※ 『비행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비행운(飛行雲) : 살아가면서 남기는 것들
관제탑 너머론 이제 막 지상에서 발을 떼 비상하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딴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 중력을 극복하는 중일 테지만 겉으로는 침착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얼마 뒤 녀석이 지나간 자리에 안도의 긴 한숨 자국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비행운이라 부르는 구름이었다. (p. 186)
<비행운>의 이들은 비행을 꿈꾼다. 더 나은 다른 새로운 세상으로의 높은 비상. 하지만 이들의 꿈은 좌절당하고,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의 용대는 명화와 중국에 가고자 했지만 명화의 병과 죽음으로 중국어를 읊기만 하는 택시기사 일을 한다. <하루의 축>의 기옥은 공항에서 일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날아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다른 사람이 남기고 간 것을 치우기만 한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언제나 속까지 침착하고 여유롭지 못할 것이고, 그 사람이 남긴 것들이 완벽하지는 못하다. 완벽해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공항에서 청소부 일을 하며 다른 사람이 화장실에 남기고 간 것들을 뒤처리하는 미옥은 비행운을 ‘안도의 긴 한숨 자국’이라 표현한다. 어쨌거나 날아오르기를 해냈다는 것의 안도. 어쨌거나 오늘도 무사했다는 한숨. 그렇게 따지면 날아오른 사람만이 ‘비행운’을 남기는 건 아닌 거 같다. 인간이라면 살아있는 동안 으레 무언가를 남기게 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하지만 남기는 건 이름뿐이 아니다. <네 여름은 어떠니>의 미영은 이런 독백을 한다. ‘곧이어 내가 살아 있어, 혹은 사는 동안, 누군가가 많이 아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누군가가 나 때문에 많이 아팠을 거라는 느낌이.’(p. 43)
<비행운>에는 삶과 죽음이 첨예하게 엮어져있다. 물, 큰 나무, 임신, 섹스,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 장례식, 배설, 결혼, 귀신, ... 누군가가 죽을 때, 누군가는 새로 태어난다. 단지 살기 위해서 뻗어진 손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던 행동이 친구를 다치게 만들었다. <비행운>의 등장인물들은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누군가에게서 상처를 받는다. 그게 의도했던 것이든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든 한 점 부끄럼 없는 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간은 누군가와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살아간다는 건 행운보다는 비행운(非幸運)을 만날 일이 더 많고, 내가 남긴 비행운(飛行雲)에 그로 인해 다치고 다치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간다는 건, 누군가의 희생이 불가피하게 필요한 행위이다.
2. 비행운(非幸運): 살아가면서 겪는 시련들
단편의 등장인물들은 특별하지 않다. 어딘가에서 봤을 법한, 볼 법한 평범한 사람들이다. 익숙한 이름의 인물들이 겪는 상황이 크게 낯설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대체 어디서 날아온 건지 모를 먼지[1]와 벌레들, 말 걸지 말아줬으면 하는 친척 아저씨, 괜히 신경 쓰이는 손톱, 엉망이 되고 마는 친구와의 여행. <물 속 골리앗>의 판타지적인 배경조차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먹고[2], 싸고[3], 자고[4], 사랑하고[5]. 그만한 여력이나 시간이나 이유가 없을 때도 인간은 삶을 쉽사리 놓지 못하고 근본 욕구를 해결한다. 그것을 해결하는 게 삶의 목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이조차 해결하기 쉽지 않다.
<비행운> 인물들은 모두 혼자 생활하는 인물들이다. <벌레들>엔 젊은 부부가, <물속 골리앗>에선 모자가, <호텔 니약 따>에선 친구들이 함께 있지만, 분명 가까운 사이임에도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외로움을 느낀다[7]. <하루의 축>에선 사랑하는 아들이 교도소에 가고,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엔 아주 잠깐의 행복한 시간 후 아내가 죽었다. 고민이 있어도 나누지 못하고 속으로 끌어안고, 몸이라는 ‘가장 비싼 악세서리’(p. 240) 하나만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상황에 처한다.
각자도생(各自圖生). 제각기 살아 나갈 방도를 꾀한다는 의미의 사자성어이다. 조선 시대 대기근이나 전쟁 등 어려운 상황일 때 백성들이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유래된 말이다. 지금 사회는 각자도생의 시대이다. 대기근도, 전쟁도 없지만 한국이라는 경쟁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더 앞자리를 차지하려 치열하게 싸운다. 어려서부터 12시 넘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있고, 잠을 쪼개고 쪼개 온갖 자격증과 시험을 준비하며, 경쟁자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안도를 하기도 한다. 단적인 예로 2014년의 세월호 사건 이후, 어떤 사람들은 사고가 일어난 학년과 같은 나이인 학생들에게 “너희는 경쟁자 줄어서 좋겠네.”라는 말을 하고, 어떤 학생들은 ‘단원고 특별 전형’이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화를 내기도 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는 것을 넘어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한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만연한 사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 현실이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취업을 하지 못한 청년들, 하더라도 만족할 수 없는 혼자 생활하기에도 각박한 돈을 받는다, 다른 사람들한텐 무시받기 일수, 머리가 숭숭 빠진 것을 실수로 보였는데 일하고 직장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챙기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챙길 여유가 생길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그리워하며 ‘자신의 부재를 알아주는 사람’(p. 10)을 사랑하고, ‘직접 손을 ᄈᅠᆮ어 만질 수 있는 누군가의 체온’(p. 317)에 위로를 받는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밖에 치유할 수 없다고 한다는 말처럼. <너의 여름은 어떠니>의 병만이,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의 명화가, <서른>의 ‘언니’가 상처받은 주인공을 위로해주고 치유해준다.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 걸까? 왜 살고 있는 걸까? <비행운>은 그에 대한 답을 주진 않는다. 그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 비참과 불행, 비행운(非幸運)을 보여주며 마치 ‘사는 게 힘들지? 원래 사는 건 힘든 거야. 그러니 네 불행에 이유를 찾지 말자. 네가 힘든 건 네 잘못이 아니야.’ 라며 덤덤하게 체온을 나눠준다.
[1] ‘가끔은 이 많은 먼지가 어디서 날아오는지 궁금했다. 날마다 쓸고 닦아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 이 세계를 구성하는 입자들의 행방이. (전자책기준 p. 54)
[2] 그래도 나는 먹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소리 없이 먹었다. (p. 100)
[3] 소변은 베란다에 싸고, 대변은 통에 받은 빗물을 이용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p. 97)
[4] 정말 다 큰 처녀 총각들이 한방에서 생활하고 있었어요. 같이 먹고 자고 싸고 하면서요. (p. 320)
[5] 살림을 차린 후, 용대와 명화는 수중의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반지하에서 살만 섞었다. (p. 156)
[6]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니 죽는 편이 나을지 몰랐다. 방법은 간단했다. 그냥 손에서 힘을 빼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나는 철골을 꽉 쥐고 있었다. (p. 121)
[7] 남편의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소리샘으로 넘어가는 신호음과 그 뒤에 이어지는 정적이 A구역의 어둠처럼 아득했다. (P. 77)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말수가 줄다 점차 한마디도 않는 날이 많아졌다. ... 나는 좀 외로웠다. (p. 100)
서윤은 통화 내용이 궁금했지만 먼저 말을 걸지 않을 모양이었다. 은지는 서윤으로부터 두어 자리 떨어진 곳에 주저앉았다. (p. 302)
'서평.감상.리뷰.분석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홍균,『자존감 수업』서평_ 오늘 할 일: 나를 사랑하기 (0) | 2020.03.24 |
---|---|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서평_ 합리적인 개인주의자 (0) | 2020.03.24 |
히가시노 게이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서평_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는 기적이 있다. (0) | 2020.03.24 |
김수현,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서평 _ 나는 나에게만 좋은 사람이면 된다. (0) | 2020.03.24 |
F. 스콧 피츠제럴드의『위대한 개츠비』 속 등장인물과 미국 문화 (0) | 2020.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