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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감상.리뷰.분석/책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서평_ 합리적인 개인주의자

※ 『개인주의자 선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고백: 이 사회에서 개인주의자로 살기

한국사회에서, 적어도 젊은 2030 세대 사이에서 개인주의는 이전과 같이 부정적인 용어가 아니다. 스스로를 개인주의자라고 지칭하는 사람이 많으며, 집단주의보다 현대 사회에 더 걸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나 ‘개인주의자 선언’같은 에세이가 인기를 끄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주의자들은 ‘나’의 시선이 보편적인 시선이라 생각하지 않고, 이 사회에서의 이방인처럼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인 판사 문유석은 “나는 사람들을 뜨겁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혐오증이 있다고까지도 할 수 있다.”라고 고백하고, ‘나는 개인주의자다’라며 선언한다. 이런 사람들이 목소리 큰 사람들 사이에 묻혀 눈에 안 띄는 것 아닐까 해 용기를 내어 솔직하게 생각을 털어놓는다.(p15)

1부의 제목은 ‘만국의 개인주의자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이다. 모두가 Yes를 말하는 곳에서 혼자 No를 외치기는 상당히 껄끄럽다. 위계질서가 있는 직장에서 뿐만 아니라 가족, 하다못해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그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괜히 분위기를 흐리고 싶지 않아서, 나만 참으면 되는 일이라서, 혼자 싫다 말한다 해도 소수이기 때문에 달라질 건 없어서, 괜히 눈치 보여서, 다른 사람들이 싫어할 거 같아서, 더 많은 사람이 좋다면 좋은 일이기 때문에. 하지만 이런 일이 계속되다보면 스스로의 행복에서 조금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서로 함부로 간섭하지 않고 배려하는 성숙한 개인주의 문화의 사회라면, 이런 문제에 고민하지 않고 ‘싫다’라고 말하고 좋아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만국의 개인주의자들이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그대들이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다. 똥개들이 짖어대도 기차는 간다.’(p64)

 

2. 존중: 개인주의자의 필수 덕목

1부가 개인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작가 개인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2부의 제목은 타인의 발견, 3부의 제목은 세상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이다. ‘나’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 이 세상으로 주제가 확장된다. 왜 ‘개인주의자 선언’을 하는데 다른 사람의 삶까지, 세상의 일까지 신경을 써야할까?

작가는 초반에 개인주의자로 살다보면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고민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와 다른 타인을 존중해야 하는가. 아니, 최소한 그들을 참아주기라도 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가끔은 내가 양보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내 자유를 때로는 자제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타인들과 타협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 그들과 연대해야 하는가.’

이 고민에 대한 답은 ‘결국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타인을 존중하고, 양보하고, 타협해야 한다는 게 어떻게 보면 모순적으로 보인다.

우선 개인주의가 이기주의가 아니라는 걸 이해해야한다. 나만 잘 살면 된다며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집단주의가 개인보다 세상(집단) 전체를 중요하게 여기고 개인은 그 부분이라고 여기는 반면 개인주의는 세상의 중심에 자신을 두고 세상은 개인을 중심으로 이해한다. 즉, 개인주의의 개인은 ‘나’가 아니라 각자의 개인을 말한다. 내 선을 침범받길 원하지 않는 것만큼 다른 사람의 선도 침범하지 않는, 각자의 개인을 존중해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혼자 힘으로 혼자서만 살아갈 수 없으며 우리는 사회 속에서, 집단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이 행복감을 가장 많이, 자주 느끼는 원천은 인간이기 까지 하다. 때문에 다른 사람의 불행과 행복이 내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영향이 나에게까지 오게 된다. 모두의 개인이 행복한 사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회이다. 앞서 말한 고민의 답은 책의 마지막 문장과도 연결되어있다. 우리 하나하나는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 아이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 우리는 서로의 아이를 지켜주어야 한다.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