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민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사치스러운 고민[1]일 수도 있고,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뻔한, 어떻게 보면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는 고민[2]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고민이 얼마나 진지하고 심각하고 무거운지는 다른 사람이 판단할 수 없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나오는 사건은 다른 사람의 고민[3]을 담은 편지를 받고 진지하게 답해줬던 나미야 할아버지의 태도에서 시작한다.
1. 편지
편지는 오래된 소통의 수단이다. 특별한 기술이나 도구 없이 정보나 생각이나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편지를 쓰고 보내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한 번 편지를 보내기 위해선 편지지를 고르고, 펜을 고르고, 한 자 한 자 글씨를 쓰고, 우체통에 넣으러 가야 하는데, 보통의 수고가 아닐 수 없다. 거기다 상대방이 편지를 언제 받았을지, 읽었는지, 답장을 썼는지, 답장은 또 언제 오는지를 확인하기도 어렵다. 때문에 편지를 주고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편지는 잘 버려지지 않는다. 버리더라도 읽은 즉시가 아니라 우선 어딘가에 따로 보관되는 게 일반적이다. 모아둔 편지를 읽다 보면 그 때의 기억과 감정이 되살아나 추억에 젖기도 한다. 편지의 이런 특성으로 작가가 편지와 고민 상담, 타임슬립이라는 소재를 함께 엮은 걸지도 모르겠다.
2. 잡화점: 필요한 게 무엇인가요?
고민은 일종의 비밀이다. 자신이나 주위 사람이 가진 문제, 사생활, 약점 등이 확연히 드러나기에 아무에게나 공공연하게 떠벌리고 다닐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상담을 받고 싶고, 의지하고 싶고, 고민을 해결하고 싶어한다. 혼자 어깨에 짊어지고 있기란 어렵고 무겁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익명이란 가면을 쓰고 글을 쓴다. 흔히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런 고민 상담 류의 글이 올라오는 걸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친한 친구나 가족에게도 못하는 고민을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혹은 모르는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 있곤 한다. 그 사람이 이 상황을, 자신을 객관적으로 봐 줄 것이라는 믿음, 내 주위 사람에게 고민이 누설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미야 잡화점은 그런 일종의 익명 고민 상담소이다. 편지 답을 해주는 사람이 진지하게 응해줄 것이라는 게 확실하고, 그리고 자신을 밝히지 않아도 되기에 큰 부담 없이 사람들은 잡화점의 우편함에 편지를 밀어 넣는다.
잡화점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용품을 파는 상점이다. 나미야 할아버지는 잡화점에 없는 물건은 손님이 미리 주문하면 다른 곳에서 연락해 받아와 팔았다.[4] 할아버지가 취급한 건 그런 물건을 넘어서, 고민 상담까지 포함됐다. 다른 상품과 다른 점은, 돈을 내지 않아도 받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받아간 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활력과 자신이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뿌듯함이었다.[5]
3. 기적: 일상을 바꾸는 힘
현재와 과거, 미래와 현재 사이에 편지가 텀을 두지 않고 오갈 수 있다는 게 소설의 가장 큰 소제이고, 전체를 아우르는 기적이다.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특정한 물체를 통해 소통을 하는 이야기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외에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과거 형사와 연결되는 무전기를 통해 현실에서 미제 사건을 해결[6]하기도 하고, 중고 노트북으로 과거에 죽은 옛 주인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과거에 일어날 사고를 막기도[7] 한다. 하지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선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과거 사람들에겐 미래에서 사는 사람인, 좀도둑 삼인방은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일은 바꾸지 않겠다고 나름의 규칙을 만들기도 한다.
[1] ‘이런 사치스러운 고민을 들려주시다니, 참 고맙군요. 좋으시겠네. ...’ (p126) 가업을 물려받기와 음악을 계속하는 것 중에 고민하던 가쓰로가 보낸 편지에 좀도둑 삼인방이 보낸 답장이다.
[2] “이건 뭐, 말도 안 되는 소리네. 마지막 상담 편지가 하필이면 이런 거야?” ... “뭐라고 쓸까?” “뻔하지. 정신 나간 소리 작작 하라고 써.” p338, 호스티스 일을 위해 어떻게 회사를 그만둘 수 있을 까 고민하는 길 잃은 강아지의 상담 편지를 읽고 좀도둑 삼인방이 보인 반응이다.
[3] なやみ (나야미): 괴로움, 고민, 번민, 걱정
[4] “할아버지, ‘게게게의 기타로’필통, 들어왔어요?” … “응, 도매점 몇 군데에 연락해서 받아왔다. 이거, 맞지?” (p249~250)
[5] 아버지에게 새로운 삶의 보람이 된 고민상담은 당초에는 놀이 같은 요소가 강했지만 이윽고 진지한 고민이 속속 들어왔다. (p162)
[6] ‘시그널’. 김원석 연출, 김은희 극본, 이재훈, 김혜수, 조진웅을 주연으로 한 2016년 tvN 드라마
[7] 『내일』, 기욤뮈소, 밝은 세상,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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