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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감상.리뷰.분석/책

김려령, 『완득이』서평_ ‘똥주’는 훌륭한 선생인가?

똥주한테 헌금 얼마나 받아먹으셨어요. 나도 나중에 돈 벌면 그만큼 낸다니까요. 그러니까 제발 똥주 좀 죽여주세요.’

완득이는 주인공 도완득이 담임선생님을 똥주라고 부르는 것도 모자라 신성한 교회에서 선생님을 죽여 달라 기도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한다. 완득이가 새롭게 겪은 모든 일의 시작은 똥주였다.

지난봄, 똥주를 만났다. 그리고 똥주가 죽이고 싶을 만큼 싫었다. 그때 즈음 나는 킥복싱을 시작했다. 킥복싱은 미치도록 좋았다. (중략)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 누구와 대화해본 적이 없어 혼자 떠들 수 있는 교회를 찾았다. 내 몸을 언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몰라, 내 몸을 잘 움직여줄 수 있는 체육관을 찾았다. 어쩐지 아버지와 어머니도 새로 찾은 기분이다.

똥주은 계속 자신을 숨기려 하는 완득이를 찾아내 바깥세상으로 꺼내려 한다. 그리고 성공했다. 똥주는 완득이가 스승의 날마다 찾아가 절해 마땅한 업적을 세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동주가 훌륭한 선생이라 평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난색을 표하게 된다. 결과가 좋다고 해서 과정도 모두 좋았다 미화할 수 있는가? 이동주는 좋은 사람일진 몰라도 훌륭한 선생은 아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욕설과 폭력

2.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

3. 학생 편애

4. 학생의 가정환경을 퍼트림

5. 학생의 트라우마를 지레짐작하고 들쑤심

6. 잘못을 사과하지 않음

 

책이 출간된 2008년은 아직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기 전이다. 교사가 학생을 심하게 체벌하면 논란이 되긴 했지만 교육의 목적이라면 가벼운(혹은 가볍지 않더라도) 체벌은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되던 때다. 하지만 비속어를 학생 앞에서 거침없이 내뱉고 학생의 가정환경을 언급하며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린 후 오늘도 학생 팼다는 글 올라오겠다? 아니지. 경찰이 먼저 올 수도 있겠군. 신고 정신 하나는 좆나게 투철한 니들이니까.”라 빈정거린 건 다른 이야기다. 이동주는 사회과목 교사다. 유엔에 대해 가르치며 인권이 있는 학생에 대한 존중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학습권이란 나라에서 헌법상의 권리로 인정하는 원하는 것을 학습할 권리 및 학습을 위하여 필요한 교육을 요구할 권리이다. 교원의 수업권은 학생의 학습권 실현을 위해 인정되는 것이므로, 학생의 학습권은 교원의 수업권보다 앞서있다. 하지만 이동주는 빈번히 학생들에게 공부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이고 새끼들, 공부하는 거 봐라. 공부하지 말라니까? 어차피 세상은 특별한 놈 두어 명이 끌고 가는 거야. 고 두어 명 빼고 나머지는 그저 인구수 채우는 기능밖에 없어. 니들은 벌써 그 기능 다했고.”

이러한 이동주의 수업태도를 누군가 홈페이지에 고발하는 글을 쓰자 이동주는 화내며 니들 잘나가는 학원에서, 유치원 때 초등학교 마스터하고, 초등학교 때 중학교 마스터하고, 중학교 때 고등학교 다 마스터하고 오잖아. 근데 나한테 뭘 가르쳐달라는 거야. 대학교 꺼?”라 학생에게 윽박지른다. 자신은 학원 안 다녔다는 학생의 말에 대학가고 싶으면 애국가 3절을 불러보라 요구하더니 부르지 못하자 대학 가라. 저기, 친구 데리고 오면 장학금 주는 그런 대학. 환영할 거다.”라며 빈정거린다. 1등 윤하에게도 애국가 전곡을 부르라 요구하지만 응하지 않자 넌 꼭 서울대 가라. 걔네들이 머리는 똑똑한데 싸가지는 좀 없거든.”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오늘부터 야자 튀거나 자는 놈들 죽는다.”라 협박하니 어처구니없다.

이동주의 논리에 따르자면 어차피 너희는 특별하지 않으니 공부할 필요 없고, 학원에서 배울 걸 다 배우고 왔으니 난 가르칠 게 없지만 너희가 원한다니 야자 챙길 테니까 빠지면 죽는다.’가 된다.

그렇다고 수업 외적인 부분에서 학생 개개인에게 신경을 많이 쓰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동주의 관심은 학교 밖 외국인 노동자들과 조폭 꿈나무처럼 보이는 기초생활수급자 도완득에게만 주어진다. 단적인 예로 완득이가 혁주의 손가락을 부러트렸을 때나 아버지의 자동차를 긁어놓은 옆집 아저씨를 때렸을 때 열심히 완득을 변호하고, 완득이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 시시콜콜 분석하며 오지랖을 부렸다. 그러나 동일하게 같은 반 학생인 윤하에겐 그런 오지랖 넖은 선생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윤하를 성희롱한 염준호에겐 별다른 체벌을 가하지 않고, 전학가고 싶다는 윤하에게 버티라고 말했을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윤하는 반 내에서 왕따를 당하며, 소문 때문에 다니던 학원을 관두기까지 했음에도 완득이에게 윤하가 너 좋아하는 것 같더라하며 윤하를 붙여준 게 끝이다.

소설은 완득이의 시점에서 쓰였기 때문에 완득이의 시야 밖에서 이동주가 얼마나 다른 학생들에게 잘 대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동주는 학교의 선생님보단 학교 밖,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힘쓰는 인권운동가의 삶에 더 충실했다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동주의 거침없고 신랄한 어투와 행동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을 수도 있다. 선생님의 변덕과 빈정거림을 견뎌야하는 반 학생들도 이동주가 유치장에서 학교로 돌아오자 환호를 지르는 장면에서 그런 인기가 확인된다. 똘아이 괴짜 선생님은 유쾌하니까. 하지만 그 인기가 이동주의 선생으로서의 자질을 증명해주는 건 아니다.

완득이는 동주를 이렇게 비판한다.

똥주 하는 꼴 좀 보라고요. 학생 집에서 술 퍼마시고, 꼴리는 대로 학생이나 패고. 선생이라는 작자가 인성교육이 안 돼 있으니까, 학생한테도 그런 교육을 못 시키잖아요.’

이상적인 선생님의 모습에서 상당히 거리가 있는 이동주는 학생들과 독자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또한 다른 평범한 선생님이라면 하지 못할 도완득 바른 길로 이끌기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학생에게 한 잘못들의 면죄부가 되는 건 아니다.

이동주의 가장 큰 문제는 널 위해서야라는 명목으로 학생이 드러내고 싶지 않아하는 가정환경을 퍼트리고, 트라우마를 들쑤신다는 것에 있다. 완득이에게 큰 소리로 기초수급물품을 가져라가 말하고, 완득이네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 아무런 고민 없이 다른 학생들 앞에서 말한다. 완득이는 이에 독백한다.

똥주 말은 틀린 게 없다. 분명히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맞는 말이 나는 영 거슬린다. 남의 비밀을 폭로하면서 내가 거짓말했어? 진짜잖아.’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남의 자존심을 긁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 안 해도 될 말을 굳이 끼워 넣어서 웃음거리로 만들고 마는 인간. 내가 한 잘못을 나한테서 끝내지 않고 아버지까지 들먹이는 너절한 인간이다. 아프다, 엉덩이.

이동주에겐 완득이가 자기 자신을 숨기지 않기 위해 먼저 나서준 오지랖이었으며 다른 학생들에게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은 비웃을 일이 아님을 알려주는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완득이는 또다시 아버지가 비웃음당하는 걸 겪어야 했고, ‘아프다고 말한다.

완득이는 동주의 말들에 분명히 상처받았다.

전부터 느낀 건데, 니네 집 가계도는 뭐가 이렇게 정직하냐. 구성원 하나하나가 참......”
하나님. 이번 주 안으로 똥주 꼭 죽여줘야 합니다.
똥주 하는 걸 보면 왠지 죄가 있을 것 같기는 한데. 나한테 지은 죄만 해도 몇 개야. 나 말고 또 누구 가슴을 후벼 팠나. .. 남 가지고 놀기 좋아하고 가슴에 못질 쾅쾅 하는 것들은 죄다 잡혀 가야 돼.
인권 유린? 이보세요, 이똥주 선생님. 외국인 노동자만 걱정하지 말고 내 인권이나 유린하지 마세요. 제자한테는 뻑하면 조폭 새끼니 돌대가리니 해대고, 사생활이나 폭로하면서 무슨 외국인 노동자는 그렇게 챙기십니까!
내 아버지는 호킹 박사 같은 1등 대접을 원하는 게 아니라, 높기만 한 지하철 손잡이를 마음 편하게 잡고 싶을 뿐이다. 떳떳한 요구조차 떳떳하지 못하게 요구해야 하는 사람이 내 아버지다. 내 입으로 말하라고? 아버지는 이미 몸으로 말하고 있다. 그걸 굳이 아들인 내가 확인사살 해줘야 하나? 자기들은, 내 아버지는 비장애인입니다, 하고 다니나? 좆같다, 씨발. 내가 부러뜨린 갈비뼈만 아니었으면 문병 안 갔다. 똥주, 이 인간은 어쩌면 그렇게 한 대 패주고 싶은 말만 하는지.
그런데 근본을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좀 있어 보이게 비웃을 수 있으니까.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만 가지고 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떠드는 똥주. 외국인 노동자를 부리는 집에서 태어나 지금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한다고 그 사람들을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똥주. 이것이 바로 내가 똥주를 죽이고 싶었던 진짜 이유다. 나는 아버지에게도 나에게도 딱지가 앉지 않는, 늘 현재형이라 아물 수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이동주의 뼈가 담긴 말은 완득이의 가슴에 쿡쿡 박혔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라곤 청해본 적 없는 완득이가 교회에 가서 똥주 좀 죽여주세요.’라 말하게 만들었다. 17살 남학생의 귀여운 투정처럼 보이지만 아버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싸움도 하지 않는 조용한 학생이 선생에게 살의를 가질 정도로 큰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완득이는 이동주의 의도를 모두 이해하고, 이동주에게 감사하며 더 이상 적의를 갖지 않게 된다. 하지만 이게 마냥 평화롭고 행복하게 끝낼 일인가?

이동주는 완득이를 상처 입힌 것에 대해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네가 상처받는 건 네 탓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설교를 하는 등 자신의 인생 경험과 철학이 무조건 옳은 것처럼 궤변을 늘어놓는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없이 장애인 아버지가 힘들게 벌어온 돈으로 살아오고, 17살 땐 가족을 책임져야한다며 알바를 하는 완득에게 넌 진짜 가난이 뭔지 모른다며 핀잔을 주기까지 한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줄 알고 좀 더 마음을 열었을 완득이 이동주가 사실 부잣집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자 느낀 합당한 분노였음에도 이동주에게 완득이는 가르쳐야할 계몽의 대상이다. 따라서 완득이를 이해하거나 사과를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완득이에서 주인공인 완득은 철저하게 성장해야만 하는 청소년이다. 청소년은 미성숙하다. 불안정하다. 변덕스럽다. 하지만 그게 상처를 줘도 되고, 상처와 분노를 쉽게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병원에서 완득이가 이동주에게 분노하고 난 직후 나온 장면은 완득이가 킥복싱을 하며 윤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에 히죽거리고 있는 장면이다. 완득이의 분노는 어디로 사그라들었나. 알 수 없다.

이동주는 완득이만큼 소설 내에서 큰 분량을 가지고 있다. 2008년 당시에는 수긍되었던 선생으로서의 모습이 현재에는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 2020년 관점에서 이동주는 좋은 사람일지언정 결코 훌륭한 선생님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런 이동주를 좋은 선생님으로 포장하는 완득이역시 시대적 배경에 맞춰 다시 읽기를 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