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우보이 비밥>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카우보이. <카우보이 비밥>내에서는 현상금 사냥꾼을 나타내는 속어이다. 과거 한 때, 야생소떼를 잡아서 운반하는 직업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아주 다른 곳에서 튀어나온 말은 아니다. 애니메이션 안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카우보이(혹은 카우걸)는 총 네 사람이다. 그리고 개 한 마리도 있다. 스파이크, 제트, 페이, 이들의 공통점은 본래 있던 곳에서 나와서, 다시 그 곳에 돌아가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잠시 머물 곳을 찾았다. 바로 ‘비밥’호. 주인은 제트이다.
한 곳에 있으면서도 이들은 제각기 다른 시간을 바라보고 있다. 본래 머물던 곳에서 도망쳐 나오고 사랑하는 여자를 잃어버린 스파이크는 과거도 현재도 아닌 붕 뜬 상태로 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군다. ‘줄리아’라는 이름이 나올 때만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간처럼 다급하게 굴지만 다른 때는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웃거나 장난을 치는 등의 행동을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스파이크는 스스로도 한쪽 눈을 수술 받은 후, 한 눈은 과거를, 또 다른 눈은 현재를 보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과거와 현재를 모두 보기 때문에, 둘 다 중요하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과거를 통째로 잃어버리고 빚에 쫒겨 사는 페이는 현실을 보기에도 급급한 사람이다. 잃어버렸던 과거를 찾았음에도 가장 좋아했던, 자신이 있어야 하는 그 장소는 있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래서 페이는 다시 현재에 있을 수 있는 곳-비밥호로 돌아오게 된다. 호감을 가졌던 스파이크도 사라지고, 미래를 생각할 틈도 없이 현실에 붙들린다. 천재지만 어린아이인 에드는 지나간 일이 아닌 현재의 즐거운 일과 미래에 있을 기대되는 일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 에드는 아버지를 만난 후, 아버지가 자신을 또다시 버리고 떠난 후에 그를 찾아 나선다. 제트는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충직하게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제트가 수리하고, 안에서 요리하고, 식물을 키우는 비밥호는 또 다른 제트라고 볼 수 있겠다.
비밥은 1930년대 유행한 상업적인 스윙재즈에 대항하여 1940년대 중반 미국에서 발생한 보다 자유분방한 연주 스타일을 말한다. 스윙보다는 좀 더 복잡한 화성 진행과 멜로디 그리고 빠른 템포와 격렬한 즉흥연주에 그 특징이 있다. 자유분방한 태도의 주 등장인물들을 함께 모은 비밥호의 이름의 유래를 알 수 있다. 느와르 작품에 어울리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비밥이라는 용어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은 많은 ost를 사용했는데, 슬픈 상황에서 슬픈 노래가, 진지한 상황에서 진지한 노래가 나오는 게 아니라는 특징이 있다. 페이의 과거 영상을 보기 위한 장치를 찾으러 보물찾기탐험을 하듯 박물관을 힘겹게 지나가는 장면에서 귀엽고 가벼운 노래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다양한 장르 변화가 나타나는 작품의 특성에 어울리게 포크, 컨트리, 소울, 록, 발라드, 일렉트로닉 등 음악 면에서도 다양한 장르가 사용되어 극의 흥미도와 몰입감을 높였다.
삶과 마음의 문제라는 주제 의식, 온갖 장르를 아우르는 옴니버스 형식,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게 아닌 옳다 그르다 말 할 수 없는 주인공들, 무심한 듯 지나가는 에피소드들 속에 숨어있는 현실 사회에 대한 비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담긴 메시지, 유혈 장면과 엑스트라의 사망이 그대로 내비쳐지는 등 작품의 세부적인 면에서도 기존의 작품들과 차별화되는 면이 많다. 등장인물이 가진 불완전함과 불안정함을 '성장'을 통해 극복하는 보통 작품들과 다르게 과거와 현실을 되찾음으로써 '수습'하려는 분위기가 강하며, 건조하고 실사적인 분위기가 두드러진다. 완전한 해피엔딩이 아니라 주인공들이 모두 떠나고, 죽고, 어쩔 수 없이 남는 결과도 꽤나 큰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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