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의 1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간을 잡아먹는 이성이 없는 거대한 거인. 소재부터가 파격적이었다. 2013년, 원작인 동명의 만화가 애니메이션화 되면서 정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어디를 가도 ‘진격의 000’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작가의 우익 논란으로 우리나라에서의 인기가 주춤했음에도 여전히 인기작의 반열에 올라있다. 애니메이션이 나왔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잔인하고 징그러울 것 같다는 첫인상에 들여다볼 생각도 안 했다. 대체 왜 이렇게 잔인한 애니를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을 하는 걸까 궁금했었다. 이번에 1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서 인기가 있을 수 밖에 없겠구나, 깨달았다. 독특한 소재,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등장인물들, 기동장치로 선보이는 빠르고 화려한 액션씬, 흡입력 있는 스토리, 제대로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 어떻게 이 토끼들을 다 잡을 수 있을까 놀라울 정도였다. 나는 이 중 ‘거인’에 주목했다.
이 애니메이션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면, 식인 거인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빼놓을 수 없다. 제목 자체도 진격의 ‘거인’이다. 이 거인은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 사람들이 만난 주인공 같은 그런 거인이 아니다. 3, 7, 12m나 되는 그 어마어마한 크기만으로도 작은 인간을 압도할 수 있는데, 이들의 주목적은 인간을 잡아먹는 것이기에 가히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무차별적으로 인간을 잡아 입안으로 집어넣는다. 산 채로건, 팔다리 어딘가 부러진 상태건 상관없다. 남녀노소 역시 중요하지 않다. 가볍게 손만 휘저어도 그곳의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손에 잡힌 인간들은 “이거 놔!” “죽고 싶지 않아!”를 외치며 처절한 비명을 질러대지만, 이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머리가 날아가도 죽지 않고, 잘려나간 신체 일부는 징그럽게도 빠른 속도로 다시 자라난다. 재미있는 건, 이들의 생김새 자체는 결코 특출날 게 없다는 것이다. 입이 비정상적으로 크지만 헐벗어서 몸이 그대로 보이는 인간들과 비슷하다. 수염이 있거나, 탈모가 있거나, 뚱뚱하거나 하는 다른 특색도 가지고 있다. 갑옷 거인이나 애나 같이 살이 아닌 근육만 보이는 몇 거인도 살이 없을 뿐 인간의 피부 한 겹을 벗기면 보이는 속 모습과 같다. 이는 인간들이 그런 끔찍한 생명체를 단순히 ‘몬스터’가 아닌 ‘거인’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며 후반부에 나오는 반전인 ‘거인은 인간이었다.’에 대해 처음부터 대놓고 뿌려댄 떡밥이기도 하다.
거인으로 인해 사람들은 거대한 벽을 삼중으로 세우고, 벽을 뚫고 쳐들어온 거인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거인을 잡기 위해 병사들이 훈련하고, 죽는다. 이 세계관에서 주인공 에렌은 거인에게 어머니를 잃고, 복수심으로 ‘거인을 모두 죽여버리겠다.’하며 병사가 된다. 이것만 해도 소년만화에 적합한 주인공상이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 에렌은 아버지가 놓은 주사로 인해 자신도 거인이 된다. 주인공과 주인공이 중요하게 여기는 ‘인류’의 적이 된 것이다. 단순히 겉모습만 변한 게 아니다. 거인이 된 에렌은 그 모습을 조절하거나 스스로 벗어나는 모습도 보이지만 곧 감정에 휘둘리며 이성을 잃고 거인의 몸 속에 융화되는 모습도 보인다. 1기 마지막 애나와의 싸움에서 “죽여버리겠어.”라며 중얼거리는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건 작중 인물들이 꾸준히 말하는 “괴물을 이기기 위해서는 인간성도 버려야 한다.”의 표본이다. 다른 등장인물들도 에렌처럼 겉모습만 변하지 않았을 뿐, 점점 더 인간성을 버리고, 무자비해진다. 이에 대한 변명은 “이건 인류를 위한 일이었다.”면 통한다. 내부에 숨은 스파이가 의심된다는 것 때문에 많은 병사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아 그들을 피할 수 있었던 죽음을 겪게 만들거나, 거인을 피하기위해 동료의 시신을 내던진다거나, 민간인 사상자와 부상자가 생길 게 뻔한 도시에서 대작전을 벌이거나. ‘인류를 위해서’. 정당성 있는 말이다.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겉만 거대하고 속은 증기밖에 없어 가볍기 짝이 없는 거인과 다름없는 생각이다. 괴물을 이기기 위해 인간성을 벌여야 한다지만, 인간성을 버린다면 괴물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무언갈 얻기 위해서는 소중한 것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소중한 것을 버려서까지 얻은 게 얼마나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은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바깥의 거인을 막는다 한들 안에서 생겨나는 거인을 막을 도리는 없을 것이다. 거인은 아무리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다 한들, 전에 사람이었다고 한들 사람을 끔찍하게 죽이고 먹는 괴물이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려면 아직 이성이 있을 때, 거인의 가장 약한 부분을 뚫고 나와야 한다.
아직 작품을 끝까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 거인이 무엇인가, 어디로부터 왔는가 등에 대해선 모른다. 하지만 작가가 거인을 단순히 ‘공공의 적’ 위치에만 두지 않고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건 확실하다. 아직 보지 못한 다음 화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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