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장면 하나하나가 명화 같다는 칭찬이 자자한 이 영화는 액자식 구조로 여러 이야기가 존재한다.
한 여자가 죽은 작가의 비석 앞에서 책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는 이야기, 1985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작가가 책 소개를 하는 이야기, 1968년, 한때 찬란했으나 망해가는 비수기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요양차 찾아온 작가가 호텔의 주인인 노신사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이야기, 노신사, 제로의 과거 그랜드 부다페서트의 진정한 콘시어이자 그의 스승, 친구, 형제였던 무슈 구스타브에 대한 이야기. 영화는 제로와 구스타브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이건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걸 알려주듯 말하는 노신사의 목소리가 나레이션으로 깔린다.
이 이야기 자체가 책 속의 이야기라는 건 영상 속 화면 구성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작가의 서재부터 호텔 외부, 호텔 내부 식당, 로비, 목욕탕, 감옥 등 모든 장소는 반으로 딱 접으면 나오는 데칼코마니인 양 완벽한 대칭으로 이루어져있다. 장소 속 인물들도 (인물이 없다면 다른 사물을 넣어) 가운데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마치 네모난 책을 펼친 것처럼 보인다. 정제된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서 대칭으로, 좌우, 상하로 움직이는 화면을 보고 있으면 책을 읽는 것처럼 캐릭터들의 표정, 행동, 말을 그들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보게 되고 책장을 넘길 때의 기대감을 같이 느끼게 된다.
책처럼 보이게 하는 건 화면 구성뿐만이 아니다. 핑크색의 호텔, 강한 원색의 호텔 내부, 직원들의 옷차림 등 현실에서 보기 힘든 색상이나 강한 대비로 호텔은 마치 동화 속 세상처럼 보인다. 호텔 외의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공작부인의 집은 매우 차갑고 어두운 색, 감옥은 회색빛의 칙칙한 색으로 관객에게 이곳이 어떤 곳인지 강렬한 색체를 통해 시각적으로 강하게 말하고 있다. 보편적으로 영화에서 사용하는 빛, 색을 사용하는 이유를 잘 모르는 관객이라도 바로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이 은밀하지만 은밀하지 않은 표현은 더더욱 영화를 동화처럼 보이게 한다.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다소 황당하고 과격하고 빠르게 전개되는 스토리와 코믹스러운 연출은 이 ‘동화처럼’ 보이기에 한몫을 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어린이를 위한 동화인 건 아니다. 우리나라의 등급 판정은 ‘청소년 관람 불가’이기까지 하다. 대놓고 드러나는 구스타브의 귀부인들과 함께하는 사생활, ‘사과 먹는 소년’ 대신 벽에 걸린 성관계 중인 여성들을 그린 그림, 잘려서 단면이 보이는 손가락이나 머리통 등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이 다소 등장한다. 이야기 배경이 전쟁이라는 점에서 난민인 제로를 대하는 군인의 태도와 아름다운 호텔을 장악하는 군대의 모습에 당대 현실을 씁쓸하게 보여준다.
위에 언급했듯이 영화는 대칭으로 이루어져있다. 배경부터 등장인물의 위치, 행동 등 어느 한쪽에 무게를 치우치게 그냥 두지 않았다. 영화의 분위기도 대칭적이다. 환상적인 배경에 유쾌한 사건들이 겉모습으로 드러나 영화를 둥둥 뜨게 만든다면 그 반대편에 참혹한 죽음들로 적당히 균형을 맞춘다. 만약 영화에서 죽은 사람이 구스타브에게 시련과 행복을 줄 공작부인 한 명이였다면 그저 예쁜 장면이 많은 코미디 영화로 남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감독은 그렇게 두지 않았다. 제로는 가족이 모두 죽은 전쟁 난민이었다. 그 제로가 들려준 이야기 속 진정한 사건의 시작은 공작부인의 죽음이었고, 제로와 구스타브의 험난한 모험 속에서 여러 명이 죽는다. 목숨이 9개라는 설이 있는 고양이도 매우 간단하게 죽었다. 이야기의 배경은 전쟁이니, 이야기에 나타나지 않았어도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이야기 마지막 즈음엔 제로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아가사와 그의 어린 아들이 병으로 죽고, 그 전에 열차 안에서 제로를 지키려던 구스타브는 총 맞아 죽는다. 주요인물이 모두 죽는 셈이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이 아니다. 영화의 처음과 끝 공동묘지라는 것부터 일반적인 동화와 거리가 멀다. 이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작가는 죽었고, 작가보다 나이가 훨씬 많던 제로도 죽었을 것이다. 이들의 유쾌한 이야기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이름을 달고 닫힌 결말로 마무리된다. 아름다운 영화는 유쾌하게 사건을 풀어가는 중에 참혹한 죽음들을 마주치게 한다.
작가는 초반에 책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부터 여러분께 전혀 상상도 못 할 이야기를 들은 토시 하나도 빼지 않고 온전히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영화는 재밌다. 하지만 단순히 재밌고 아름답기만 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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