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벌새는 1초에 80번의 날개 짓을 하며 공중에서 꿀을 빨아먹는 가장 새다. 벌새가 날갯짓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날 수 없기 때문에, 음식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벌새>의 주인공 은희는 이러한 벌새와 닮아있다. 중학교 2학년, 작은 키의 순하게 생긴 여학생 은희는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은 세상과 삶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 애쓴다.
<벌새>의 영문 제목은 <House of Hummingbird>, 벌새의 집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마주하는 첫 번째 사회는 자신의 가족이 있는 집이다. 자신의 의사를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수 없는 아이는 생존을 위해 울고, 엄마의 이름을 부르며 발버둥 친다. 관심과 애정을 받으려 애쓰는 건 철없는 행동이 아닌 정말 그야말로 벌새의 날개 짓과 같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첫째인 언니, 공부 잘하는 오빠가 있는 삼남매 중 막내 은희가 가족 내에서 보이는 행동은 이렇다.
1. 오빠에게 맞을 때 참고 견디기
2. 언니의 일탈을 모른 척하고 도와주기
3. 아빠의 수상한 행동을 엄마에게 말하지 않기
4. 부모님의 일을 도와 떡집에서 일하고, 밤늦게까지 돈 세기
크게 특별하지 않고 얌전한 은희는 어떤 사람인가 알 수 없다. 은희가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 말을 하는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아빠는 자신의 이야기만 전달하면 끝인, 가부장제의 가장이었고, 오빠는 공부하느라 언니는 노느라 바쁘다. 그나마 이야기를 자주 하는 엄마는 매일 커다란 파스 두 개를 어깨에 붙이고 다닐 만큼 본인의 삶에 너무 지쳐서 은희에게 큰 신경을 써주지 못한다. 가족들은 은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크게 관심이 없다. 그리고 부모님의 관심은 자신들의 생업인 떡집 일과 공부를 하지 않고 놀러 다니기만 하는 첫째 언니와 예비 서울대생인 공부 잘하는 장남, 오빠에게 쏠려있다. 오빠에게 맞았다는 것을 저녁식사자리에서 말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너희 싸우지 좀 말랬지.”가 전부다. 싸운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맞은 거지만 은희는 그에 반박하지 않고 입을 다문다. 언니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는, 하지만 공감해주는 듯 한 묘한 눈빛과 마주할 뿐이다. 고통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 오빠의 폭력을 견디는 것처럼 조용하게 있는 건 은희 나름의 생존수단이었다. 하지만 은희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노래방을 좋아한다.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을 찾고, 좋아할 수 있는 것을 계속해서 찾아 나선다. 아래는 은희가 자신을 찾기 위해 행동한 목록이다.
1. 수업시간에 그림그리기
2. 단짝 친구와 깊은 고민을 함께 얘기하기
3. 자신을 그냥 좋아해주는 남자친구, 여자 친구 사귀기
4. 클럽에서 춤추고, 담배피고, 노래방 가기
5. 트램펄린을 뛰고 문방구에서 도둑질하기
6. 좋아하는 한자 선생님에게 떡과 책, 편지를 선물하기
집 밖에서의 은희는 보다 적극적이고 무모할 정도로 돌발적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당황스럽기도 한 은희의 일탈은 은희를 숨 쉴 수 있게 해주는 밧줄이며 세상에 자신을 알아 달라 외치는 발버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세상은 은희에게 무관심했고, 오로지 자기편이라 생각했던 것들을 잔인하게 등을 돌렸다. 수줍은 첫 입맞춤까지 한 남자친구의 바람, 모든 고민을 털어놓았던 친구의 배신, 경찰서로 보낸다는 문방구 아저씨의 말에 그냥 보내라 하는 가족의 무관심. 끝엔 자신이 세상 무엇보다도 너무 좋다 말한 후배가 매정하게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라고 말한다.
얌전히 있어도, 얌전히 있지 않아도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은희는 이러한 심정을 자신을 한 사람으로 봐주는 어른, 영지 선생님에게 말한다. “선생님도 자신이 싫어질 때가 있어요?” 이 물음은 나는 내가 너무 싫은데, 죽는 걸 상상할 만큼 살기가 너무 힘든데 다른 사람들도 이럴까? 그럼 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어떻게 살아야할까? 하는 속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에 영지 선생님은 자신도 그럴 때가 많다며, 자신도 그렇다며 은희에게 공감하며 위로해준다. 그리고 영지 선생님은 이후로도 은희가 입원해있는 병원에 홀연 듯이 꿈처럼 나타나 “은희야, 너 이제 맞지 마. 누군가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알았지?” 라는 조언을 해주고 간다. 은희의 태도는 점차 변화한다.
1. 영지 선생님의 행방을 원장 선생님에게 직접 묻고, 기다리며 부당한 결과에 화를 낸다.
2. 자신의 태도에 부모님이 ‘성격이 나쁜 애’라 평가하자 “나 성격 안 나빠”라며 소리 지른다.
3. 자신을 때리려는 오빠에게도 적극적으로 반항한다.
4. 두 번이나 자신을 버린 남자친구에게 “난 널 사랑한 적이 없다”며 뒤돌아선다.
5. 영지 선생님에게 줄 선물과 편지를 가지고 직접 찾아간다.
6. 부모님 몰래 언니와 언니 남자친구와 무너져 내린 성수대교에 간다.
중학교 2학년 은희는 친구 지숙의 말에 의하면 ‘자신밖에 모르는’ 아이다. 몸과 마음이 급격하게 자라나며 모든 게 혼란스러운 청소년기에선 자신밖에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지숙 역시 자신밖에 몰라 은희를 배신하지 않았던가. 은희보고 쟤는 공부 못하니까 파출부가 될 거라 말하는 은희의 반 친구나 자신을 좋아해주는 여자 친구를 두고 뒤도 안 돌아보고 엄마를 따라가는 남자친구, 은희의 오빠도 언니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의 것을 이해하고 다른 이의 아픔에 충분히 공감하기엔 아직 미숙하다. 작은 벌새들은 자신들 주위의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도 벅차다. 날개 짓을 하면서도 왜 내가 이렇게 열심히 날개 짓을 해야 하는 걸까 하며 당장 꿀을 마시기도 바쁠 텐데 생산성 없는 고민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은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되도록 도와준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은희는 누군가에게 영지 선생님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의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를 담은 영화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박수치는 이유는 은희의 삶에 우리의 모습이 녹아들어있기 때문이다. 살았던 곳도, 시간도, 경험도 다르지만 청소년 시기의 우울함, 막막함, 서글픔, 억울함, 생각지 못한 곳에서 받았던 작은 위로는 누구나 한번쯤은 가졌던 감정일 것이다. <벌새>는 그러한 감정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고 있다. 영지 선생님과 은희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손가락 움직일 힘은 있어.” 아무리 막막하더라도 손가락은 움직인다. 작은 움직임으로 우리는 버틴다. 큰 세상 속에서, 단지 생존을 위했던 날개 짓은 결국 우리를 높은 곳으로 비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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